조선후기 서울의 상업정책
Ⅰ. 머리말
조선후기는 양난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서 정치, 사회 등 여러 가지로 전시기와는 많이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피폐해진 민생을 바로 잡기 위한 방도가 대두되고 또한 양난 가운데의 손실 및 파괴는 물론 새로운 변화가 들어온 것이 사회가 변화하는 데 새로운 영향을 준 것이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며 결과적으로 사회전반의 변화를 가져와 나아가서는 조선후기를 거쳐 근대화로 나아가는 밑바탕 중에 하나로도 볼 수 있다 그 중 조선후기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경제적 변화이다. 사농공상의 개념 하에 있던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상인층등의 신분의 변화가 생기면서 경제적 관념이나 상황에도 많은 변화가 생기는데 이런 변화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곳이 지금의 서울,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은 당시 유이민의 유입도 많도 상업도시이자 소비도시인 면모와 더불어 국왕이 있는 곳이라는 등 여러 가지 조건과 더불어 많은 경제, 즉 상업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상업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을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한 상업정책들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상업정책등은 단순히 경제상황과 연결되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정치등과 맞물려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이러한 상업정책의 배경이 된 상업발달에 대해, 또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나온 상업정책들을 영 · 정조 시대를 기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상업체체의 변화
(1). 상업발달의 바탕
조선후기 상업발달로 인구이동, 신분제 동요, 지역구조의 변화와 함께 도시의 발달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 서울은 상업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시민의식이 성장하고 기존의 사농공상의 개념 하에 있던 생각이 바뀌어지면서 상경제적 관념이나 상황의 변화 속에 사람들이 생각이 변화되어진다. 이 시기 서울이 …(생략)
(2). 지방 - 포구산업, 장시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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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라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지역에는 선박접안 시설을 갖춰 포구가 신설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상품으로 등장하는 물품이 많아지고 보다 편리한 운송수단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였다. 많은 실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당시 가장 우월한 운송수단은 선박이었으며, 선박을 통한 상품유통에의 사회적 요국 증가할 때 포구가 유통 중심지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상업중심지로 발전하였던 포구들은 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으로, 조수가 올라올 수 있었던 포구였다. 대포구는 서울의 경강포구 외에도 낙동강 하구의 김해 칠성포, 금강하류에 위치한 은진의 강경포, 그리고 커다란 강은 없었지만 북어생산의 집산지로서 발달한 동해안의 원산포, 그리고 남해안의 창원 마산포가 대표적인 곳이었다. 이들 대포구는 원산장, 마산포 주위의 창원장, 강경포 주위의 논산역 등의 장시와 밀접하게 연계되면서 발전하였다. 이외에도 섬진강 유역의 화개역, 하동의 두치역이 포구와 연계되면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평안도의 대청무역의 통로구실을 한 박천의 진두장도 대정강 연안에 위치한 포구였다. 또한 영산강 하구의 법성포 사진포 전주의 사탄 등지도 상업중심지로 성장한 포구들이었다.
이와 같은 포구시장권의 발달은 선박에 의해 운송되는 대규모의 물량을 빠른 시일 내에 소비할 수 있는 큰 소비시장이 포구 주위에 생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추세는 점차 대포구 주위의 소포구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점차 대포구 주위의 소포구들도 점차 주위의 장시와 연결되면서 지역내 시장권의 중심으로서 발전하였다.
18세기 이후 지방의 포구들이 지역내 시장권의 중심으로 성장함에 따라 전국적인 포구시장권이 성립될 수 있었다. 포구간 시장권은 원산포와 부산포, 마산포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을 포괄하는 유통권, 김해 칠성포와 만산포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과 낙동강을 포괄하는 유통권, 영산포와 법성포를 중심으로 하는 영산강과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