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족층의 자기 도태 과정 → 기술관과 서얼층의 형성
- 기술관 : 직업의 우열 관계에서 인문적 관인의 다음 차례로 밀리고,
- 서얼 : 혈통의 하자로 사족의 적통에서 빗겨갔다.
▸ 평민의 성장
-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변화 속에서 경제력을 얻은 일부 평민들은 교생교생이나 약정약정 · 권농권농 같은 지위를 얻고자 하였다.
④ 중인의 신분 상승 노력
▸ 서얼 : 소통소통운동
- 전문 기술직 이외의 벼슬길이 법제적으로 막혀있었다.
- 집단적 상소 운동과 국가적 배려로 18세기 후반부터는(영정조 때) 점점 청요직청요직으로의 허통허통이 이루어졌다.
- 정조 때 유득공 · 박제가 · 이덕무 등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된 것이 유명한 사례다.
- 그후에도 서얼허통은 꾸준히 계속되어 마침내 1851년(철종2)에 ‘신해통공’ 조치를 거쳐 완전한 청요직 허통이 이루어졌다.
▸ 기술직 중인 : 문학운동과 통청통청운동
- 서얼의 허통에 자극을 받아 대대적인 연합 상소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
- 그러나 이들은 축적한 경제력과 탄탄한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문예활동, 저술활동 등으로 꾸준히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갔다.
- 양반 계층에 비해 국제 정세나 근대 문명에 민감하여, 개화 운동과 초기 부르주아 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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