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 (정신의_본성과_기원)

<< 정신/의식의 본성과 기원 >>
제1장: 정신/의식과 육체
?? 물질과 정신
사람들은 대개 육체와 정신(영혼 또는 의식, 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 구분된다고 믿는다. 이런 전통적 믿음에 따르면 정신은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육체를 이용하여 외부 세계와 접촉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어떤 정신활동(사고, 명상 등)이 육체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생각의 기원은 태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인들은 영혼을 일종의 입김이나 숨결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영혼은 평소에는 우리 몸속에 깃들어 있지만, 경우에 따라 몸 밖으로 나올 수도 있는 독립적 실재다.1) 예컨대 꿈을 꾸는 것은 잠자는 동안 우리의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다른 곳을 여행하는 것이며, 반대로 사악한 다른 영혼이 우리 몸속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정신이나 영혼이 육체와 구분되는 독립적 실체라는 관념론 철학이나 이원론 철학은 이런 종류의 원시적 사고가 세련된 형태로 체계화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정신이 생명체의 오랜 진화와 발전의 산물이…(생략)

a) 반영 과정에는 두 개의 개별적인 물질적 과정이 존재하며, 그 두 개의 과정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성립한다. 그 중 첫 번째 물질적 과정이 근원적/1차적(primary)이며, 두 번째 과정은 파생적/2차적(secondary)이다. 예컨대 빨간 장미꽃이 피었고(첫 번째 물질적 과정) 우리의 망막에 그 장미꽃의 상(像)이 맺혀 뇌의 시신경으로 전달된다면(두 번째 물질적 과정), 두 번째 과정은 첫 번째 과정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b) 앞에서도 말했듯이 1차적 과정에서 어떤 고유한 형태로 존재하던 물질은 2차적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형태로 재생된다. 그리고 그 반영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것은 감각 기관 및 뇌의 기능에 의존한다. 쉽게 말해 잠자리가 보는 세계와 우리가 보는 세계는 같지 않다. 그러나 잠자리의 감각이나 우리의 감각이나 어떤 공통의 물질적 세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더구나 인간의 뇌는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반영 능력, 즉 사유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때 사유의 결과는 언어, 즉 개념으로 나타나며, 한마디로 주어와 술어의 형태를 지닌 명제(命題; proposition)가 된다. 예컨대 내 앞에 있는 분필을 보면서 나는 “이 분필은 희다”(This chalk is white)라고 말한다/생각한다. 이 명제는 주어와 “S is P”라는 논리적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 현실 속의 분필이 그렇게 S와 P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사유를 통한 개념은 실재를 우리 방식대로 반영한 결과인 것이다.

c) 반영 과정은 생명/몸10)을 가진 유기체의 활동의 결과다. 따라서 물질세계가 의식 속에 반영되는 구체적 방식은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능동적 관계 및 그 유기체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d) 인간의 경험과 사회적 삶, 한마디로 실천이 인간 의식/정신의 조건을 형성한다. 인간의 지각과 사유는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복잡한 기계를 검사하는 숙련공의 지각은 그 기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지각과 같을 수가 없다. 이때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은 물리적인 시력의 차이가 아니다. 시골 풍경을 보는 농부의 지각과 도시인의 지각은 서로 다르며, 화가의 지각과 투기꾼의 지각도 같을 수 없다.